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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위인

김교신의 생애

by 금여사는블로깅중 2024. 5. 24.

김교신의 생애

김교신은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 사포리에서 부친 김념희(金念熙)와 모친 양신(楊州嵐)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선생의 가문은 함흥 차사 박순(朴淳)과 함께 함흥에 갔다가 죽음을 면한 김덕재(金德載)의 후예이다.

 

김교신이 성서조성 창간당시의 모습
성서조선 창간당시의 김교신

어린 시절과 유학 시절

1903년, 즉 그가 두 살 때 부친은 폐암으로 요절하였다. 1912년 그는 함흥 주북의 한씨 가문의 4세 위인 한매(韓梅)와 결혼했다. 1918년에는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정측영어학교에 입학했다. 이 무렵 그는 유교적 인생관 및 사회관에 회의를 느끼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하루는 노방전도에 접해 깊이 느끼는 바 있어 입신을 결심하고 바로 동경의 야라이쪼 성결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드디어는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1920년 4월의 일이다.

신앙의 갈등과 무교회 기독교

그러나 조직으로서 교회의 체질적 결함과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교회의 내분을 목도하고 그는 심한 고민을 한다. 그러다가 착한 목사가 도리어 축출당하는 모습을 보고 교회출석을 단념하고 반년간이나 방황했다. 그 해 말에 일본의 "무교회 기독교"의 창도자인 우찌무라 간조오(內村鑑三)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성서강의를 청강하기에 이르렀고, 그 후 7년간, 즉 1927년 초 그가 귀국할 때까지 그에게 사숙하였다.

학문과 신앙의 결합

1922년 그의 나이 22세 때, 그는 당시 중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고등사범학교로는 최고 명문인 동경고등사범학교의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뜻하는 바 있어 지리 · 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이 7년간은 그의 인격형성과 신앙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시기였다. 신앙의 스승 우찌무라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의 성경강의에서도 가장 명강의로 꼽히는 "로마서 강의"를 하던 때였었고, 김교신은 이 강의 내용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맨 앞줄에 앉아 경청을 했고, 그러다가 속죄의 신앙에 대한 깊은 체험을 겪었다.

1925년부터는 우찌무라 문하의 한국인 유학생 6인이 함께 하여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회랍어를 배우면서 원문으로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동인은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이며, 이들은 귀국하면 성서를 통해서 한국민족의 영혼을 구원하는 모임과 사업을 계속할 것을 굳게 약속했다.

성서조선의 창간과 활동

1927년 7월 이들은 오랜 숙원이었던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월간지로 발간하기 시작했다. 이 「성서조선」은 40페이지 전후의 신앙 동인지인데, 이들 동인들의 사정에 의해 1930년 5월호인 제16호부터는 김교신이 주필로 책임 편집하는 개인잡지로 되었다. 이후 12년간 이 잡지는 일제의 식민 경찰 · 검찰의 혹독한 검열을 견디며 계속 발간되다가, 1942년 3월 제158호의 권두언인 "조와" (弔蛙 /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가 어떤 혹한에도 살아 남는 민족의 희망을 개구리의 생명력을 빌어 노래했다는 검찰측의 해석에 의하여 폐간되기에 이르렀다.

성서조선 사건

이 때 그는 전국의 약 삼백여 지우, 독자, 동지들과 더불어 피검되었고, 그중 함석헌, 송두용, 류달영 등 13인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이것이 <성서조선사건>이다. <한글학회사건> 또는 <조선어학회사건>은 이해 10월에 일어났는데, 이 두 사건은 그 본질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교직 생활과 제자들

김교신은 이렇게 정기간행 잡지를 통하여 신앙 · 구도 · 전도의 활동을 함과 동시에 사립 고등보통학교 (현재의 중 · 고등학교에 해당)의 교직생활을 정열적으로 계속하였다. 그는 귀국 직후 고향인 함흥의 영생여고보의 교사로 교직생애의 첫발을 내딛었고, 이듬해에는 「성서조선」의 발간사무를 맡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양정고보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10년간 그는 양정고보에서 박물교사로 교육에 힘썼는데, 제자들에게 차원 높은 애국의 길과 진지한 삶의 자세를 몸소 보임으로써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이 무렵의 그의 제자로는 어린이 운동의 개척자인 <새싹회>의 윤석중, 덴마크의 농촌운동을 우리 나라에 소개한 류달영, 또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 우승하여 한국 남아의 기상을 온 세계에 알린 손기정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이름을 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그의 인격적 감화에 의해서 이곳에서 삶을 설계했던 것이다.

손기정과의 특별한 관계

특히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의 한 사람으로 동경 예선까지 따라간 사람이 다름 아닌 김교신이었음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손기정 씨의 회고담에 의하면, 이 예선에서 중간지점부터는 선두가 되었는데, 그 때 선도차에 탄 김교신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손기정은 연도의 사람은 보지 않고 오로지 이 스승의 눈물만 바라보며 뛰어 드디어 우승했다는 것이다. 손기정은 다음과 같이 스승을 추모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선생님만큼 크시고 참다우신 교육자 그리고 애국을 여러 면으로 스스로 실천하신 분은 본 일이 없다. 참으로 선생님은 크신 분 같다.

 

대한민국 마라토너 손기정의 모습
대한민국 마라토너의 손기정의 모습

By Presumably Japanese/German press - <a rel="nofollow" class="external text" href="http://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160811.html">손기정 ‘발 프린팅’ 역사에 남긴다</a>, 퍼블릭 도메인, <a href="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063517">링크</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