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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위인

김교신이 가졌던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

by 금여사는블로깅중 2024. 5. 26.

김교신이 가졌던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

이 창간사와 폐간호의 권두언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무엇인가? 그 것은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이다. 그에 의하면 첫째, 외국의 선교사업 비에 의해서 유지되는 교회는 진정한 우리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 이며, 둘째, 국적이 뚜렷하지 못하고 민중의 가슴과 생활에 파고들지 못하는 기독교는 우리의 기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요, 셋째, 성서를 통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앞날의 진정한 독립의 정신적 기틀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민족교육이라는 것이다.

 

첫째는 민족적 기독교의 이념의 탐색 및 생활화요, 둘째는 종교적 신앙과 교육적 실천의 이상적인 조화요, 셋째는 교육에 있어서 인격적 감화력의 절대성을 나타내 보임이요, 넷째는 개인잡지를 통해서 소신을 밝힘으로써 민족사회의 온 성원을 교육의 대상으로 포섭한 일 이요, 끝으로 그의 동지, 독자들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다음 세대에 계승 · 발전시킨 '코이노니아'의 육성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민족정신사적 업적

거목이 쓰러지듯 그가 타계한 지 불과 넉달 후에 해방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지들의 한결같은 한탄의 소리는 "선생님이 살야 계셨 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또는 "이 혼탁한 시대에 선생님이 우리를 도와 주셨더라면!" 하는 푸념의 소리로 변했을 것임은 가히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명을 다하고 간 것이다. 만일 그가 살아 있었 더라면, 그 다정다감한 성품 때문에 인정에 휘말리어 추기 싫은 춤도 추었을 법했고, 또 그 양칼 같은 두뇌와 무쇠 같은 의지의 소치로 불의와 싸운답시고 정치에 관여하여 뭇 의사들의 전철을 밟았음직도 하 고, 또는 교육계의 원로로 추대되어 학장 자리 하나 하다가 학생과 당국 사이에 끼어 사표를 내었다 받았다 하면서 신경을 헛되이 소모 했을 법도 했고, 아무튼 '스타일'을 구겼기 십중팔구였을 것이다. 그 래서 그의 제자들 사이에는 선생님이 젊어서 깨끗하게 돌아가셔서 좋았다는 소리도 있다 한다. 그의 생애와 사상의 민족정신사적, 민족교육사적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김교신의 전집

1975 년 4 월, 그의 전집 간행 완성을 자축하기 위해 서울 YMCA 강당에 제자들이 모여 스승을 추모하는 자리를 가졌다. 30 년 전에 타 계한 일개 중학교 교사를 이제 백발이 성성한 제자들이 회상하며 눈 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았을 때, 필자는 가슴이 뭉클해짐을 금할 수 가 없었다. 생명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이 자리에 서 "학문은 짧고 교육은 길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또 김교신의 삶, 신앙, 사상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문헌으로는 국 내외 73 인의 신앙동지 제자들의 추모의 글이 담겨진 「김교신과 한국」 ( 1972 ), 노평구 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간행된 평신도의 성서연구 및 신앙소감이 담겨진 「성서와 인간」 ( 1972 ), 6.25 때 성경을 불사르기보 다는 내가 죽겠다고 부인과 함께 자결한 신앙동지 안학수 의사의 글 이 모아진 「안학수 신앙문집」( 1970 ) 등이 있다.

 

그의 전집은 내용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마다 신앙에 관한 연구, 교육에 관한 연구, 민족정신에 관한 연구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서 그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고 이론을 바탕으로 한국교육에 관한 활용적인 지침을 얻어 낼 수 있다. 또한 이론을 실천으로 이어가는 가늠이 책정되어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학교육에 관한 실천적인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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